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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국내여행

효도는 핑계인 제주 여행: 세번째. 아빠의 작은 정원

by es-the-rkive 2022. 1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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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취미가 없는 사람이었다.

일과 집, 교회 뿐인 성실한 가장의 이상적인 인물이었다.

일도 적당히 하는 걸 본 일이 없다. 회사에 다닐 땐 얼굴을 보기 힘들었고, 자영업을 시작한 뒤로 누구보다 일찍 시작하고 늦게 닫았으니까. 

(내 일중독이 어디에서 왔는지 고민해 본 적이 없다. 그리고 이 얘기를 하면 엄마아빠 다들 깔깔 웃으신다)

 

동생이 취직과 함께 이미 독립한 나와 같이 살 수 있는 여건이 되자 부모님은 이듬해, 육지살이 근 30여년만에 제주로 돌아왔다.

조금 쉴 줄 알았지만 쉴 줄을 몰랐던 아버지는 바로 친척의 소개로 건설현장에 자재를 납품하는 회사에서 주 6일 근무를 시작했고 5년을 꼬박 일했다. 

장손으로 노부모님을 모시는 것까지 여전히 바쁜 삶이었지만, 일산 시골짝 농지에서도 하지 않았던 아버지의 새로운 취미가 생겼다. 

집앞 손바닥만한 텃밭을 가꾸는 일이었다. 

 

분기에 한 번, 제주에 내려갈 때마다 집앞 작디작은 텃밭은 신기하게도 계속 커졌다. 

아빠는 새 흙과 돌담을 계속 만들었고, 씨앗을 얻어서 새로운 꽃과 식물을 계속 심었다.

텃밭 대부분은 파, 고추 같은 식물들을 위한 자리였기 때문에, 가장자리를 따라 알록달록한 꽃 라인이 생기기 시작했다.

제주인 답게 귤농사는 안 짓더라도 귤나무를 심은 건 덤이고

 

국민학생일 때부터 살던 바로 그 집에서, 환갑이 넘어 돌아온 아빠는 이제서야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로 집을 꾸미기 시작했다.

집을 둘러볼 때면 집 앞, 뒤에 있는 뉴비들을 하나하나 소개해주시기도 한다.

 

난 '모야모'에 검색해야 식물을 안다. 이름을 적진 않을거다.

 

과일나무가 갈 때마다 늘어난다. 

아빠가 일(직업, 집안 대소사, 교회 일)이 아닌 무언가에서 '이걸 하고 싶다, 할 거다'라고 이야기한 게 많진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자그마한 집은 그대로인데 점점 식물에 둘러싸인 집이 되어가는 것이 좋다.

 

 

집 뒷편 슬레이트 지붕 높이까지 올라온 나무도 처음 봤다.

 

초점이 나갔지만 햇살과 풀잎이 좋았기 때문에.

 

꽃과 나무, 식물보다 더 아빠가 좋아하는 건 아마 책일 것 같다. 

지식에 대한 탐구를 늘 좋아하는 아빠에게 책을 쓰시길 종종 권하고 있다. 

블로그도 배우고 싶다고 했는데, 다음에 내려가면 블로그를 만들어 드려야겠다.

 

 

효도는 핑계인 제주 여행: 첫번째. Vamos!

효도는 핑계인 제주 여행: 두번째. 엄마의 취향

👉 효도는 핑계인 제주 여행: 네번째. 워케이션

효도는 핑계인 제주 여행: 마지막. 좋아하는 것에 대한 조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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