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취미가 없는 사람이었다.
일과 집, 교회 뿐인 성실한 가장의 이상적인 인물이었다.
일도 적당히 하는 걸 본 일이 없다. 회사에 다닐 땐 얼굴을 보기 힘들었고, 자영업을 시작한 뒤로 누구보다 일찍 시작하고 늦게 닫았으니까.
(내 일중독이 어디에서 왔는지 고민해 본 적이 없다. 그리고 이 얘기를 하면 엄마아빠 다들 깔깔 웃으신다)
동생이 취직과 함께 이미 독립한 나와 같이 살 수 있는 여건이 되자 부모님은 이듬해, 육지살이 근 30여년만에 제주로 돌아왔다.
조금 쉴 줄 알았지만 쉴 줄을 몰랐던 아버지는 바로 친척의 소개로 건설현장에 자재를 납품하는 회사에서 주 6일 근무를 시작했고 5년을 꼬박 일했다.
장손으로 노부모님을 모시는 것까지 여전히 바쁜 삶이었지만, 일산 시골짝 농지에서도 하지 않았던 아버지의 새로운 취미가 생겼다.
집앞 손바닥만한 텃밭을 가꾸는 일이었다.
분기에 한 번, 제주에 내려갈 때마다 집앞 작디작은 텃밭은 신기하게도 계속 커졌다.
아빠는 새 흙과 돌담을 계속 만들었고, 씨앗을 얻어서 새로운 꽃과 식물을 계속 심었다.
텃밭 대부분은 파, 고추 같은 식물들을 위한 자리였기 때문에, 가장자리를 따라 알록달록한 꽃 라인이 생기기 시작했다.
제주인 답게 귤농사는 안 짓더라도 귤나무를 심은 건 덤이고
국민학생일 때부터 살던 바로 그 집에서, 환갑이 넘어 돌아온 아빠는 이제서야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로 집을 꾸미기 시작했다.
집을 둘러볼 때면 집 앞, 뒤에 있는 뉴비들을 하나하나 소개해주시기도 한다.
과일나무가 갈 때마다 늘어난다.
아빠가 일(직업, 집안 대소사, 교회 일)이 아닌 무언가에서 '이걸 하고 싶다, 할 거다'라고 이야기한 게 많진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자그마한 집은 그대로인데 점점 식물에 둘러싸인 집이 되어가는 것이 좋다.
꽃과 나무, 식물보다 더 아빠가 좋아하는 건 아마 책일 것 같다.
지식에 대한 탐구를 늘 좋아하는 아빠에게 책을 쓰시길 종종 권하고 있다.
블로그도 배우고 싶다고 했는데, 다음에 내려가면 블로그를 만들어 드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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