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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생각/매일의 삶

봄을 앞두고, 지난 겨울 돌아보기 | 1-2월 회고

by es-the-rkive 2023. 3.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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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와의 긴 이별 준비

30대의 시작부터 5년을 바친 회사와 기나긴 이별을 하고 있다.
내 퇴사를 듣고 며칠 후에 '먼저 퇴사를 하게 되었다'며 갑작스레 떠난 팀장님은 내게 마음을 먹으면 빨리 떠나라고 했지만, 
이전 회사를 떠나면서 결심한 것이 있었다.
이별할 시간을 주자고.
 
지난 가을부터 고통의 하루를 반복하며, 
남아서 싸우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과 떠나는 것 사이에서 고민하는 것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것은 빠르게 떠나는 것과 천천히 헤어지는 방법 사이에서 결심하지 못한 내 마음이었다.
애정인 줄 알았던 조직에 대한 마음이 실은 내가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미련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 미련을 이루어줄 환경이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경험한 후 나는 긴 고뇌의 끈을 놓았다.
퇴직이 쉽게 도망치는 선택이 아니라고 나의 선택을 스스로 용서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말이다.
 
연말에 처음 꺼낸 퇴직은 한 달이 되어서야 매듭 지어졌다. 
그 사이 번아웃과 옴짝달싹 할 수 없는 업무환경에 지친 나는 대서양이 보이는 유럽으로 휴가를 떠나기로 마음 먹었다.
그리고 휴가 직전, 드디어 회사에 말할 수 있었다.
이젠 떠나겠다고.
 

 

즉흥에 가까운 2주 간의 유럽 여행

동생의 결혼을 열두시간 쯤 앞둔 1월의 자정에,
헬싱키를 거쳐 마드리드로 가는 항공편을 덜컥 결제해버렸다.
이미 두 달을 매일같이 검색한 여정이었다. 
남미, 영국, LA, 뉴욕, 어디든 이 곳을 벗어나고 싶어 지겹도록 검색한 끝에
1년 동안 공부한 스페인어의 성과를 스스로 보고 싶다는 자기평가 같은 마음으로 마드리드를 선택했다.
 
떠나는 날까지 결정했던 건 

  • 인천 - 마드리드 항공권
  • 마드리드 - 포르투 항공권
  • 마드리드 첫 3박 4일 숙소 (마드리드에선 10일을 있었다)
  • 포르투 숙소

가 전부였다.
마드리드의 미술관 같은 명소도,
포르투의 와이너리도 예약하지 않았다.
 
숙제처럼 효율을 따져가며 계획을 짜고,
계획을 성실하게 수행하는 일 같은 여행을 하고 싶지 않았다.
발 닿는 대로 가고, 상황이 닥치면 스페인어로 말해보자!
막상 출국을 앞두고는 조금 두려운 마음도 들었지만,
이전보다 나를 달래는 시간이 짧아졌다.
살면서 막다른 골목에 다다를 때 언제나 해결했던 경험을 기억하면서.
 
여행의 기억은 사진과 함께 천천히 풀어내는 중이다.
너무 빨리 정리하자니 아깝고, 천천히 남기자니 기억이 휘발되는 듯한 그 사이 어딘가에서
어떤 날은 성실히, 어떤 날은 조금 나에게 여유를 주면서 
지나간 시간과 길 위에서 했던 생각들을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베스트 하우스메이트, 동생의 결혼

다섯 살 어린 남동생은 취업 전까지는 내게 반은 친구, 반은 아들 같은 존재였다.
부모님을 대신해서 진학 상담을 자처하기도 했었다.
 
그런 동생이 사회생활을 하기 시작하면서 거진 5년을 같이 살았다.
적당한 지저분함을 용인할 수 있는 가족이어서,
서로 싫어하는 것을 책임져주는 무심하지만 위해주는 하우스메이트여서 좋았다.
설거지 후에 꺼끌거리는 손의 느낌을 지독히 싫어하는 나를 위해 동생은 밥상도 치우지 않게 하고 설거지를 해주곤 했고,
대신 빨래가 귀찮은 동생을 위해 나는 세탁부터 빨래를 개서 넣어주는 '말 없는 친절'을 서로에게 베풀었다.
 
독립을 시킨 동생은 우연히도(우연...이지?) 같은 건물의 다른 회사로 이직했고,
이제 우린 같은 건물에서 가끔 점심을 하고, 힘든 날은 커피 한 잔을 나누는 사회인 친구다.
그런 동생이 자신보다 단단하고 야무진, 그리고 우리 집에 없는 캐릭터인 -뚝딱거리지 않고 밝고 긍정적인 - 분을 만나 가정을 이루는 날.
누나가 울면 시누이 될 사람이 운다고 말 들을까봐 안 보이게 울었다.
 
나이가 들 수록 철이 없는 내멋대로인 누나 대신에 엄마 아부지가 소원을 이룬 것 같아서 고맙다.
그리고 노래 잘 하더라. 인정한다. 
 


무엇보다, 드디어 안정을 찾은 내 마음

퇴직을 선택하고, 우연한 기회로 연이 닿은 회사와의 설레는 인터뷰를 하게 되었다.
그 동안 삐뚤빼뚤하게 내 멋대로 살아온 길을 곡해하지 않고 바라봐주고, 관심을 갖고 깊게 물어봐주는 곳.
이전에 했던 모든 내 노력과 헌신이 빛을 발할 수 있는 기회가 있는 곳.
다음 행선지를 정하지 않고 살기 위해 퇴직을 선택했지만, 
감사하게도 더 달리고 싶은 마음을 느끼면서 앞으로 한 걸음 가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긴 시간 동안 멀어질 준비를 하고 있다.
한 사람, 한 사람 만나서 인사를 나누고,
천천히 일을 나누어가며 변수에 대처하는 경험을 함께 하고,
지난 5년을 잘 공유하는 방법은 같이 대처하며 경험을 심는 것이 내가 생각한 가장 좋은 '계획 없는 계획'이다.
 
이젠 잠을 잘 자고,
괴로워하지 않고 하루를 즐겁게 보낼 방법을 궁리한다.
불편한 것은 빨리 잊어버리려 다른 일을 벌인다.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그 안에서 힘과 위로를 얻는다.
 
나의 다음 행선지에서는 이 마음을 지키면서 달리는 조금 더 어려운 게임을 해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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